서대문도서관 맞은편 주택가, 송죽교회 옆 작은 오르막길의 모퉁이를 돌면 좁은 골목길에 위치한 2층짜리 흰색 주택이 보인다. ‘닷라인TV 마을예술창작소’라는 큼지막한 간판이 없었다면, 영락없는 가정집이다. 프로그램 홍보 포스터들이 붙은 담을 지나 문을 여니 열린 창문을 통해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린다.
“규원 언니, 머리를 뒤로 이렇게 넘겨봐!”
“내가 한쪽 귀만 보이게 그려줄게, 크크크.”
5월의 토요일 오후 4시. 초등학생 아이들 8명은 주말 나들이 대신 이곳에서 캐리커처 수업에 한창이다.
일상의 최전선, 마을로
서대문구 홍제1동, 주택가에 있는 ‘닷라인TV(DotlineTV)’는 인터넷 미술방송을 운영하는 큐레이팅 연구소이자 마을예술창작소이다. 2011년부터 2013년 9월까지 바로 옆 동네 홍은동에 있다가 마을공동체사업 보조금을 받아 이곳으로 이사를 해 2013년 11월 23일 개소식을 했다. 공간의 접근성과 개방성이 요구되는 마을예술창작소를 운영하는 데 있어 지금의 위치가 아쉽지는 않을까?
“홍은동 시절에는 도로와 골목의 접합지점에 있어서 외부인도 많이 왔었죠. 새로운 보금자리는 주택가가 어떨까 했어요. 마을예술창작소는 주민들의 삶 속에 들어가 함께 소통하는 게 더 의미가 크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대로변에 위치하지 않고 눈에 잘 띄지 않아도 그 소통이 잘 이루어지는지 한번 실험해보고 싶었어요.”
닷라인TV 대표이자 독립 큐레이터로 일하는 문예진 대표는 미술관 소속 큐레이터로 일하다가 대중과의 소통지점을 찾아 나섰다. 예술이란 장르를 예술가들만의 리그가 아닌 주민들의 삶의 공간으로 이끌어내고 싶어 미술프로그램을 재미있게 전할 수 있는 인터넷 미술방송을 만들게 되었다. 그녀는 창작소에서 문예진 큐레이터님 대신 ‘문큐’로 불린다.
“옆집 할머니, 아이들도 볼 수 있는 방송을 만들고 싶었죠. 첫날부터 시청률이 폭주하는 성공적인 스타트를 끊게 되었어요(웃음). 생각보다 사람들이 문화예술에 대한 욕구가 크다는 것을 느꼈죠. 전시 기획이나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한 1인 큐레이팅 연구소도 함께 운영하며 미술방송을 위한 수익 기반을 마련하던 중에 온라인 매체 외에 공간이라는 살아 숨쉬는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마을예술창작소를 시작하게 된 계기예요.”
주민들의 삶과 어우러진 유기적인 이 공간은 주민 스스로 예술을 생산해내고 진화해 나가는 곳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공간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것이다.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주민들
‘닷라인TV’에서는 외부 전문강사 초빙 수업을 거의 하지 않는다. 공간에 대한 호기심으로 발을 들여놓게 된 주민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하나둘씩 풀어놓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거기에 ’문큐‘가 색깔을 입히고 기획을 더해 수업으로 연결시킨다. 일부러 강사를 찾아내려 애쓰지 않아도 서대문구 내에 비교적 탄탄한 네트워크가 있어 자연스럽게 주민들이 모인다고 한다.
가죽공예, 미술심리치료 등의 수업이 그렇게 대화를 통해 우연히 강사를 발굴하는 과정을 거쳤다. 현재 진행 중인 캐리커처나 통기타 수업도 마찬가지다. 통기타 수업의 경우, 기타를 배운 주민은 다시 신참 주민을 가르쳐야 한다. 릴레이인 셈이다.
이곳에서의 활동은 다른 곳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생활 운동 프로그램으로 ‘몸 펴기’ 수업을 맡았던 주민강사는 수업을 들은 다른 주민의 소개로 근로복지센터의 수업을 맡았다. 1회당 10만원의 강사비를 받는 진짜(?) ‘강사’가 된 셈이다. 또 다른 주민강사는 ‘문큐’가 기획하는 전시의 공연·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한다. 자신의 재능을 이용한 마을활동이 지속적인 커리어와 수익으로 연결된 셈이다.
10분 완성 도전! 캐리커처
한 시간 수업에 모델은 3명, 초등생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권선희 선생님의 ‘쓱쓱 싹싹 캐리커처’ 수업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8명의 아이들이 번갈아가며 모델을 하는데, 관찰력과 표현력을 함께 발휘해야 하기 때문에 바쁘다. 오늘은 은서, 규원, 상우 순서로 모델이 됐다. 아이들의 요구사항에 맞춰 모델이 된 아이는 머리 모양을 바꾸기도 한다.
이제 심사시간이다. 아이들의 모든 그림을 바닥에 펼쳐놓고 선생님과 아이들이 모여 서로의 그림을 보며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는다. 권선희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의견을 묻기도 하고 보완점을 얘기해주기도 한다.
“은서는 어떤 그림이 가장 잘 그린 것 같아?”
“다현아, 네가 그린 규원이의 머리 길이가 실제보다 짧지? 사람을 관찰하는 법을 조금만 더 키우면 훨씬 완성도 있는 그림이 될 것 같아.”
“얘들아 여기 봐봐, 상우의 귀 뒤로 이어지는 머리 부분이 포인트인데 유빈이가 아주 잘 포착했다 그치?”
권선희 선생님은 캐리커처 가르치는 일을 해왔다. 고등학교 진로체험 교육을 하면서 캐리커처에 대한 흥미가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아는 주민의 소개로 ‘닷라인TV’를 알게 되었고, 문예진 대표와 이야기를 나눈 끝에 수업을 맡게 됐다. 석 달째 열리고 있는 캐리커처 수업은 성인과 초등생을 주 대상으로 진행된다. 자신의 개성을 할 수 있는 데까지 표현하고, 자신감을 북돋아주는 데 중점을 둔다. 자기 자신을 자연스럽고 쉽게 표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권선희 씨는 말한다.
“주민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하지만 일방적인 ‘전달’이 아닌, 서로 ‘소통’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일반적인 수업과의 차이점이죠. 뭔가를 만들어내는 게 전부가 아니라 이웃과 서로 알고 얘기도 나누면서 가르치고 배워가기 때문에 저도 훨씬 수업에 애정이 생기곤 해요.”
딸 슬아도 함께 놀며 머무를 수 있는 이곳은 주민강사인 권선희 씨에게도 참 매력적인 장소라고 한다.
영어가 한자를 만났을 때, 유캔플레이
그녀의 한자 사전에는 공부의 흔적뿐만 아니라 지나온 삶이 함께 담겨 있다.
‘닷라인TV’가 홍은동에 있을 때부터 왕래하며 친분을 쌓게 된 안지오 씨의 애칭은 ‘순뎅언니’이다. 주민운영위원회라는 딱딱한 표현이 부담스러워 그냥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주민회의에 나오고, ‘닷라인TV’를 돌보며 자신의 재능으로 주민들을 가르치는 ‘주민강사’이다. 영어영문학을 전공한 그녀는 10년간 영어과외를 전문으로 하면서 독학으로 한자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도 한자와 영어의 융합교육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입시교육이 먼저인 엄마들은 반기질 않았다.
“길 가다 간판을 보면 ‘간판=看(볼 간)에 板(널빤지 판), 쳐다보는 판=sign’이라는 영어와 한자가 동시에 생각나고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였어요. 항상 공부를 놀이처럼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해왔어요. 그러다가 닷라인TV와 만나면서 꿈을 펼칠 수 있게 되었죠. 1월 말부터 4달째 ‘遊캔PLAY(유캔플레이)’라는 수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화장품, 세제와 같은 일상의 사물을 소재로 ‘놀이 같은 수업’을 하는 것이죠.”
그녀는 이 융합교육과 관련된 연구 및 집필활동을 하면서 ‘닷라인TV’와 함께 교과서를 출간 할 계획이다. 이곳에서 주민들과 만나고, 교류하는 마을살이를 시작하게 되면서 인간은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마을공동체사업의 기본취지에 공감하고 있다는 안지오 씨. 아이들에게 교육과 마을의 중심을 맞추며 교육하는 방법을 생각하느라 오늘도 에너지가 넘친다.
예술을 통해 함께 살다
가르치고 배우는 수업이 아니어도 예술을 통해 주민들은 연결된다. ‘닷라인TV’는 주민에 초점을 맞춘 지역성 기반 활동 외에도 전문 작가의 작품 전시를 통해 작가와 주민들이 상호 소통하는 ‘커뮤니티 아트’ 프로젝트도 하고 있다. 지역사회와 사람에 관심을 갖는 전문 작가를 마을 안으로 끌어와 주민과 소통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작품에 자기 자신이 출연하고, 설치에 참여하면서 주민은 작품에 애착을 가지고 공감한다. 이러한 것들도 관계의 하나인 것이다. 관계가 형성되면 주민도 작품에 가치를 부여하게 되고, 작품의 구매로까지 이어지게 될 것이다.
‘닷라인TV’에서는 예술을 통한 소통, 그로 인해 주민과 예술가들이 모두 행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작가가 마을에 입주해 살며 작품활동을 하는 ‘레지던시’ 사업도 시작했다. 작가는 안정적인 환경에서 주민들과 호흡하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 뿐만 아니다. 주민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해 만들어낸 작품을 마을예술공장이라는 개념을 적용시켜 생산·유통시킬 수 있는, 주민을 위한 ‘마을팩토리’도 진행할 계획이다.
현대미술계에서 내로라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집 앞에 슬리퍼 끌고 나와 볼 수 있고, 창작소에서 키우는 강아지를 보러 온 김에 구경하고 갈 수 있는 곳. 예술을 접하는 것이 점점 일상이
되면서 가치관과 삶이 변하고, 남이었던 사람들과 아이의 돌잔치를 함께 하면서 스펀지처럼 서서히 공동체 생활에 물들어 가는 곳.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예술을 일상에 녹여내고 함께 마을살이를 하는 것, 이것이 마을예술창작소 ‘닷라인TV’가 우리 동네에 있는 이유이다.
글과 사진_ 백지은(마을로 청년활동가)
본 기사는 서울시 마을공동체담당관실의 ‘월간마을’ 5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서울 곳곳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여러 마을공동체를 매월 주제별로 발굴하여, ‘마을로 청년활동가’들이 취재, 정하여 매주 좋은 글을 하나씩 선정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http://www.seoulmaeul.org/bbs/board.php?bo_table=webzin_bbs&wr_id=131&sfl=wr_4&stx=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