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연세대학교 신문_연세춘추] 서울에는 이방인이 없는 마을이 있다. 홍제동 마을예술창작소를 통해 본 마을의 의미

curatinglab 2016. 4. 27. 16:38

[연세대학교 신문_연세춘추]

여기저기_서울에는 이방인이 없는 마을이 있다홍제동 마을예술창작소를 통해 본 마을의 의미


                                                                     장혜진 기자  |  jini14392@yonsei.ac.kr



[24호] 승인 2016.03.26  20:32:08

허리께에 닿을락 말락 한 낮은 대문을 밀고 들어가니 맑은 기타 선율이 들려왔다. 오렌지색 조명이 밝은 응접실 구석에서 한 남성 연주자가 기타를 치고 있었다. 문턱을 넘기 전까지는 여느 주택밀집지역의 고요한 골목이었는데, 문 안에는 북적북적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말끔한 세미 정장을 입은 젊은 남성, 가벼운 차림의 중년 여성, 엄마 품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어린아이부터 똘망똘망한 눈의 강아지까지 이곳을 찾은 각양각색의 손님들은 응접실 바닥에 앉아 쿠션을 그러안고 저마다의 감성으로 기타 연주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쭈뼛쭈뼛 들어선 기자를 친구라고 부르며 푹신한 자리 하나를 내줬다.



마을예술창작소, 뭐 하는 곳이게?

동화 속에나 나올듯한 따스함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은 우리대학교 신촌캠 뒤편 홍제동에 위치한 마을예술창작소(아래 창작소)의 풍경이다. 창작소는 주민참여형 문화공간으로, 지난 2011년부터 서울시가 시행하고 있는 마을공동체 사업의 일환이다. 서울시는 「서울특별시 마을공동체 기본계획」에서 성장을 중시하는 도시계획으로 인해 나타난 다양한 도시문제를 사람 간의 네트워크, 즉 마을을 통해 해결할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창작소는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2015년 기준 23개소가 운영되고 있으며 그중 마을 주민의 주도로 설립된 주민자율형은 15개소, 각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가 그룹이 제안해 설립된 민관협력형은 8개소가 있다. 창작소는 주민들에게 미술, 스트레칭과 같은 전문 분야의 강좌를 비롯해 작은 콘서트, 골목 탐방, 영화 감상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이 강좌의 수강생과 강사는 모두 마을 주민이며, 강좌가 진행되는 공간은 언제나 누구에게든 개방돼 있다. 사실 기존에 서울시는 유사한 사업으로 문화센터를 운영해왔다. 문화센터는 시에서 직접 전문가를 뽑아 운영하는 하향식 시스템이다. 하지만 창작소의 경우 주민들이 직접 강사가 되는 상향식 시스템으로 문화센터의 운영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기자가 방문한 홍제동의 창작소는 민관협력형으로, 닷라인 예술콘텐츠연구소가 서대문구와 합작한 공간이다. 마을미술관을 표방한 이곳은 언뜻 보기에는 작은 놀이방처럼 보였다. 하지만 알고 보니 천장과 벽면을 메운 피조물들이 모두 예술작품이었다. 손님들은 작품 아래에서 밥을 먹고, 기타 연주를 들으며 수다를 떨었다. 닷라인 예술콘텐츠연구소의 큐레이터이자 창작소의 관리자인 문예진(41)씨는 “주민들은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고, 작가의 작품에 참여할 수도 있다”고 공간의 의의를 밝혔다. 이어 그녀는 “이곳에서 취미로 심리치료를 공부하다가 자기 재능을 발굴해 이곳을 기반으로 진출한 주민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서울시 곳곳에 존재하는 창작소에는 예술가가 주민, 조력자, 관리자 등 여러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홍제동의 경우 ‘레지던시 작가’시스템이 있다. 창작소가 서울시의 지원금을 받아 작가에게 작업 및 주거 공간을 일정 기간 임대하고 창작소에서의 활동을 격려하는 방식이다. 이곳의 레지던시 작가 1호 오수연(41)씨는 “예술가들끼리 생활하다보면 미술이 일상에서 분리될 위험이 있는데 이곳은 항상 주민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럴 염려가 없다”고 전했다. 레지던시 작가 2호 김현호(34)씨 역시 같은 입장이었다. 미국에서 현대미술을 공부하다가 이야기를 통한 예술을 하고 싶어 정서적으로 공감대가 많은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그는 “혼자서 활동하는 것보다 이런 주민참여형 공간에서 작업하는 것이 참여자를 모으는 데 수월할 것으로 판단해 입주하게 됐다”고 밝혔다. 실제로 그는 그리운 사람을 캔버스, 쿠션 등 여러 형태의 작품으로 만들어 주는 일명 ‘소환 프로젝트’를 통해 많은 주민과 만나고, 그들에게 기쁨을 안겨주고 있다.
우리대학교에서 ‘마을학개론’을 강의하는 이태동 교수(사과대·국제관계/환경정치)는 이 같은 마을 활동을 ‘생활 정치’로 명명했다. 그는 “이것은 일종의 자치(自治) 개념으로, 자신이 사는 곳을 직접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홍제동 창작소처럼 어색했던 이웃과의 관계를 바꾸거나 골목에 예술작품을 배치하는 등의 행위부터 당장 집 앞의 쓰레기를 치우려고 팻말을 걸어두는 것까지 모두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교수는 “이것을 단순히 지방자치단체의 사업으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정책 시행 이전부터 이러한 마을 단위의 활동이 존재해왔음을 인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대의제의 보완으로, 대의민주주의에 따라 선출된 대표자들이 미처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주민이 직접 참여해 변화를 주는 행위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성과를 걱정할 이유가 없다

창작소의 접근성과 홍보성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기자가 손바닥만한 스마트폰에 지도를 띄워놓고 골목을 굽이굽이 돌아들어 간 후에야 홍제동 창작소를 찾아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대학생들에게 이곳은 다소 생소한 공간이다. 장지현(응통·14)씨는 창작소를 알고 있냐는 기자의 물음에 대해 “이름이 예쁘다”며 “동화를 쓰는 곳이냐”고 되물었다. 곁에 있던 강보미(경제·14)씨는 “마을을 예쁘게 꾸며주는 곳일 것 같다”며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이는 창작소의 지속가능성에 있어 전혀 문제될 것 없는 사안이다. 기자의 우려는 성장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에 갇힌 편협한 시각에 불과했다. 관리자 문씨는 이 공간이 “마을 주민을 위한 것”임을 강조했다. 실제로 이곳은 주택밀집지역 한가운데 위치해 방문객 중 대다수가 주민이다. 그러다보니 새로 찾아오는 손님들도 모두 입소문을 타고 찾아온 인근 거주자들이다. 처음 이 창작소는 마당의 강아지들을 보러 주택가의 아이들이 몰려든 것을 시작으로 방문객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자신의 아이를 챙기거나 미술을 배우러 이곳을 방문하면서 서로에 대해 알게 됐다. 문씨는 “40년간 같은 동네에 살면서 일면식도 없던 분들이 이곳에서 친해진 경우도 있었다”며 이와 같은 사례가 많음을 전했다. 어릴 적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있던 ‘이웃’의 개념이 되살아난 것이다. 이처럼 구체적 수치로 나타낼 수는 없어도, 이곳의 행보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이고 있다.
문씨와 같은 관리자가 없을 때도 사람들은 이곳을 자신의 공간처럼 아꼈다. 기자가 방문할 당시 방문객들에게 레지던시 작가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본인을 일일MC라고 소개한 한 중년 여성은 솔선해 다른 손님들에게 전시를 설명해줄 정도로 활기찬 열정을 보였다. 문씨는 “이 공간은 누군가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 필요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라며 지속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했다. 실제로 특별한 홍보 없이도 이곳을 방문하는 손님들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마을공동체의 지속가능 여부에 대해서는 이 교수도 유사한 입장이다. 그는 “마을은 자생적 필요에 의해 생겨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서울시가 이 사업을 시작하기 이전에도 필요에 의한 마을은 존재해왔다. 이 교수는 오늘날의 마을은 목가적, 전원적 그리고 낭만적인 개념이 아님을 지적했다. 마을은 지역성과 사람들의 관계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서울시 또한 「서울특별시 마을공동체 기본계획」에서 마을을 ‘여러 공동체가 네트워크를 이뤄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되는 것’으로 정의한 바 있다. 일례로 이 교수는 “공동 육아 등의 필요성에 의해 아파트 내부에서 마을이 생겨나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오늘날 도시 간의 경계를 넘어 국가 간 경계까지 초월해 생활하는 우리세대에게 마을이란 생소하고 불가능한 이상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마을은 곳곳에 숨어있다. 본인이 지금 사는 곳에서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마을은 탄생한다. 혹자는 마을공동체를 정치적 성향에 따라 정의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현대적인 마을의 의미를 미처 인지하지 못한 이의 섣부른 판단일 수 있다. 우리의 마을은 어디에나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다.

장혜진 기자
jini14392@yonsei.ac.kr

<자료사진 닷라인TV>



기사 바로 가기 http://chunchu.yonsei.ac.kr/news/articleView.html?idxno=213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