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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G상상마당 웹진]큐레이터 몰라의 마술 같은 큐레이팅, 이국의 어린 윗치(witch: 여자 마법사)를 닮은 그대, 몰라

curatinglab 2011. 7. 12. 03:44


[KT&G상상마당 웹진]큐레이터 몰라의 마술 같은 큐레이팅, 이국의 어린 윗치(witch: 여자 마법사)를 닮은 그대, 몰라

<행복한 밥벌이>큐레이터 몰라의 마술 같은 큐레이팅

이국의 어린 윗치(witch: 여자 마법사)를 닮은 그대, 몰라


그대에게 씌워주고 싶은 모자가 있다. 끝이 뾰족하고, 주름진 통이 길쭉하게 뻗은 고깔이다. 이 모자는 천이 헐거워 윗부분이 앙증맞게 접힌다. 챙은 넓고 둥글되, 흘러내리지 않는다. 색깔은 파스텔 톤의 옅은 아이보리. 박음질도 말끔해, 그 색은 마치 달빛을 엷게 펴 바른 느낌이다. 그대가 이 모자를 너무 깊게 눌러쓰지 않으면 좋겠다. 이마를 살짝 드러내고, 그 이마 위로 그대의 검은 머리카락 몇 가닥을 슬며시 내보여야 한다. 마치 저 이름 모를 이국의 어린 윗치처럼.



 

모자의 주인이 될 그대는 누구인가. 나는 그대의 이름을 모른다. 본명이 문예진이라는 설이 있다. 설은 설일 뿐이다. 별 관심 없다. 사람들은 그대를 ‘몰라’라고 부른다. 나 역시 그렇게 부르기로 한다. 그대는 언제나 자신을 큐레이터라고 소개한다. 큐레이터 몰라. 큐레이터는 전시를 기획하고, 작가와 작품을 연구하며, 무명의 작가를 발굴하는 직업이라고 그대는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대의 일이 기획이나 연구라는 딱딱한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대에게 들은 바로는, 큐레이터의 일은 기획이나 연구보다 훨씬 더 매혹적인 언어로 설명돼야 옳다. 나는 마술과 춤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대의 일을 상상한다.


어떤 공간이 있다. 무채색 벽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가운데서 그대가 인사한다. 머리에는 윗치의 고깔을 썼다. 거기서 그대는 우아한 왈츠를 껴안고 춤춘다. 그러자 그대의 몸짓이 만든 선이, 허공에 곱게 드리워진다. 그 선을 따라 그림과 조각 등 각종 미술의 개체, 곧 작품이 들어선다. 그대의 선이 안내한 곳에 자리를 잡은 작품들은, 그대를 갈망한다.


작품들이 공간을 가득 채우면, 그대는 춤을 멈춘다. 갈망과 갈망 사이에 그대가 선다. 이어지는 작품을 향한 농염한 손짓. 그렇게 그대의 살갗이 작품을 스치면, 작품은 비로소 숨을 쉰다. 숨은 엮이고 엮여 하나의 합창을 이룬다. 그러면 밖에서 서성이던 관객이 그 숨소리를 듣고 작품 앞에 다가간다. 서로가 낯설지만 둘은 오래 마주한다. 마주한 채, 사랑하고, 슬퍼하고, 눈물 흘리며 감동한다. 미술(美術)을 미술답게 만드는 그대의 마술(魔術)이다.


무명의 작가를 빛나는 별로 만드는 큐레이팅의 세계


공간 밖에서 보여주는 그대의 춤은 좀 더 주술적이다. 그대는 춤으로 동굴 속 작가를 세상으로 유인한다. 그리고는 무명의 작가에게 이름을 붙여준다. 이름을 얻은 작가는 이따금 별이 된다. 마술과 같은 일이다. 그래서 별로서 빛나기도 전에 스러지기 쉬운 세상 대부분의 작가들에게, 그대의 춤은 절실하다. 그러나 춤을 남발해선 안 된다. 그대가 각인한 이름이 자칫 허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대의 춤은 마술이 아닌 기술로 격하될 터. 따라서 안목이 필요하다. 오랜 시간 갈고 닦은 눈으로, 그대의 미적 기준에 맞는 작가를 선별해, 춤을 보여줘야 한다. 그런 만큼 그대의 춤과 마술은 고독을 담보로 한다. 그대의 큐레이팅은 그런 것이다.


이 글이 어지러움을 안다. 뱅뱅 돌려 말하고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사실 나는 그대를 더 편하게 소개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부산아트갤러리와 정갤러리,  샘표스페이스를 거쳐, 지금은 독립큐레이터로, 또 미술방송국 '닷라인TV'의 대표로 지내고 있음’이라고 한 뒤, ‘대표 기획물은 고의적 입장展, 드라마트루기-세 가지 드라마展, 백조의 물밑작업展 등’이라고 덧붙이면 된다. 하지만 그런 류의 설명을 나는 외면하고 싶다. 사실 그대로의 나열을 피하고 싶다. 그대가 8년간 큐레이터로 살며 추어왔을 춤과, 고민했을 마술을 생각하면 그렇다. 춤추는 내내 그대의 다리는 얼마나 아팠을 것이며, 그대의 머리는 얼마나 혼란스러웠을 것인가. 그대가 이야기 내내 흘리던 웃음이, 실은 지금껏 속으로 삭혀온 눈물의 일부는 아닌지, 나는 묻고 싶었다. 아래, 그대를 만난 그 날을 추억한다.


웃기는 미술 방송 닷라인TV를 아시나요


 

-닷라인TV(http://dot-line.tv/)가 인기에요. 웃기는 미술방송이라니, 발상도 신선하고요. 저도 처음보고, 너무 재미있어서 배꼽 잡았어요. 평소 미술하면 어렵고 생소한 분야라고 생각했는데, 닷라인TV를 보니까 친밀해지는 느낌이더라고요. 전시회 소개며, 인터뷰 등 동영상이 많이 있던데, 전부 누가 만드나요.


촬영은 다른 분이 하고, 편집은 제가 거의 다 해요. 초반에는 뮤직비디오 감독님 등이 참여했는데, 내 감각이라는 게 있잖아요. 아무래도 제가 미술계에 몸담고 있으니까, 어느 부분을 건드리고, 꼭 드러내야 하는 게 뭔지 잘 알죠. 꼭 들어가야 하는 중요한 설명이 뭔지 관계자가 아니면 잘 몰라요. 그래서 제가 하는 거죠. 촬영할 때는, 바쁘지 않으면 따라 가는 편이에요. 아니면 촬영 감독님과 엠씨만 가죠.


-닷라인TV에 상근직원이 있나요.


처음엔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실속 있게 하고 싶거든요. 엠씨인 ‘꼬맹이’의 역할이 굉장히 커요. 그 분만 돈을 받죠. 다른 분들은 거의 미술 관계자에요. 촬영 감독 쪽에는 지원을 많이 해요. 같이 해보고 싶다, 배워보고 싶다고 연락이 많이 오죠. 엠씨 지원도 있고요.


-홈페이지에 특별히 배너 광고도 없던데, 인건비는 나오나요.


‘곰TV’랑 계약해서, 지금은 수익이 좀 있어요. 9월 1일부터 시작했는데, 닷라인TV와 동일한 컨텐츠를 제공하죠. 곰TV에서는 채널편성해주고, 배너 달아주고, 특정 프로젝트를 생중계 할 때 시스템도 지원해 주고 있어요.


-하루 방문자 수가 몇 명이나 되나요. 초반에는 폭주하기도 했다고 들었는데요.


처음에 1년 정도는 2~3만 명 정도 들어왔어요. 시작하고 나서, 매체에서 연락이 많이 왔거든요.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거죠. 요즘에는 5천명도 안 올 때도 있고, 어떤 날은 6~7천명이 오기도 하고요. 컨텐츠를 매일 못 올리잖아요. 한 사람이 매일 들어오지는 않는 것 같더라고요. 업데이트 주기가 느리니까, 며칠 있다가 다시 들어오곤 하죠. 업데이트가 늦으니까. 방송 늦게 올리면 어떡하냐는 항의도 들어와요. 애정을 가지고 질책해주시는 분들인데, 너무 고마운 분들이죠.


-동영상 중간 중간에 나오는 자막이 너무 웃겨요. 미술하면 고상한 예술이라는 생각부터 드는데, 그런 개그 자막을 보면, 요즘 말로 정말 깨더라고요. 엠씨 행동도 너무 코믹하고요.


취재 기획하기 전에 대본을 미리 써요. 지문까지 탄탄하게 써 놓죠. 예를 들어 머리를 잡고 엉덩이를 흔든다, 손에 볼을 갖다 대고 엉덩이를 실룩 실룩한다, 목소리는 개그맨 누구처럼 등 꼬맹이 행동 모두를 사전에 생각해둬요. 엠씨가 다 못 외울 정도에요. 그래서 시큐트를 만들어서, 그걸 세워놓고 엠씨가 보면서 할 수 있게 하죠.


미술관 문턱 낮추고 싶어 권위를 깨다


-초반에는 사람들이 오해했겠어요.


그럴 것 같아서 사전에 설명을 해 줬죠. 초반에는 작가님이나 큐레이터님에게, 저희가 되바라지고 버릇없어 보일 수 있지만, 대중친화적인 컨셉으로 한 거니 이해해 주세요, 하고 말했죠. 다들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주시더라고요. 컨셉에 잘 맞춰주셨어요. 그래서 요즘에는 아무리 묵직한 미술관의 총 책임자라도, 저희랑 만나면 막 웃으세요. 농담도 하려고 하시고요.


-왜 그렇게 웃기고, 재미있게 미술을 소개하려고 하죠.


사람들은 미술을 어렵게만 생각하잖아요. 대중들이 미술관을 쉽고, 만만하게 느끼는 게 저희 목적이에요. 미술관 문턱을 낮춰주는 역할을 하고 싶은 거죠.


-미술을 어렵게 느끼는 이유는 뭘까요.


예술의 본질이겠죠. 예술의 역사를 보면, 예술은 서민이 즐길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귀족, 엘리트, 부유층, 종교 지도자 같은 사람들이 누렸죠. 태성적인 한계가 있어요. 지금은 그런 계급과 계층이 무너진 시대인데, 예술 자체가 가진 어려움과 권위주의적 성격 때문에, 여전히 대중과는 거리가 멀죠. 예술이 그런 본질적인 성격을 버릴 순 없으니까, 매체가 해야죠.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야죠. 대중이 예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창작가를 욕할 수는 없잖아요. 그 예술을 어떻게 설명하고, 어떤 환경에서 보여주느냐에 따라, 대중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가 차이나죠. 닷라인TV를 하면서 그런 걸 느꼈어요.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죠.


-국내 미술계의 큰 흐름에서 보면, 닷라인TV는 어떻게 탄생한 거라고 할 수 있을까요.


1990년대였죠. 젊은 미술가들이 학계 기득권층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현대 미술 시장에서 각광 받고, 해외에서 스타작가가 돼서 나타났던 때가. 그 즈음에 대안공간이라는 게 생겼어요. 주류미술에 저항하는 의미로요. 시립, 국립, 상업 갤러리 등 주류 미술 공간과 제도권이 품어주지 못하는 재기발랄하고 창의적은 젊은 작가를 육성하고 발굴하자는 취지로 생겼죠. 그런데 제도권이 그런 작가들을 흡수하면서 대안공간도 주류가 돼 버렸어요. 대안공간에서 전시하면, 그 작가의 브랜드 가치가 올라간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생겼죠. 기존 제도권처럼 대안 공간이 대중과 소통을 못하게 된 거죠. 매너리즘에 빠진 거죠. 닷라인TV는 그에 대한 대안적인 활동 요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어요. 대안의 대안인 셈이죠. 가만 보면, 대중과의 소통에 활용할 수 있는 현대기술이 많은데, 미술만 활용을 못하고 기존 시스템에 안주하는 거 같더라고요. 닷라인TV가 그 부분을 건드린 거죠.


-이제 2년이 됐죠. 투자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없었나요.


한 번 있었어요. 하지만 제가 거절했죠. 너무 상업적으로 될 것 같아서요. 잘못하면 지금까지 쌓아놓은 게 허물어질 수도 있잖아요. 안 받은 게 좋은 선택이었지 싶어요. 2년 동안 우리 브랜드 가치가 생겼고, 덕분에 여러 기획 주관할 수 있는 프로젝트 의뢰가 들어왔거든요.


-예를 들면 'ATU(Artistsoul Across The Universe)2009'인가요.


12월 4일부터 15일까지 열리는 연말 프로젝트죠. 중간에 미술을 두고 영화, 음악, 연극을 아우르는 프로젝트에요. 음악 같은 경우는 예를 들어 인디 밴드 ‘언니네 이발관’이 공연하면, 사전에 미디어 아티스트와 소통 시켜서 공연 전이나, 중간에 미디어 아트를 삽입하는 거예요. 영화 쪽은 ‘아트하우스 모모‘와 함께 하는데, 영화 상영 전에 미디어 아트를 보여주거나, 미디어 아티스트와 감독이 상영 전에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이 있죠. 연극 쪽은 연극열전과 함께 하고요. 미술이 중심이 돼서 각각의 장르에 침투하는 거예요. 총 기획, 예술 감독을 제가 맡았어요.


더 잘 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힘들어


 

-닷라인TV를 운영하면서 가장 행복한 때는 언제인가요.


사람들이 반응을 보일 때죠. 사실 거짓이나 예의상으로 좋다고 얘기하는 거는 눈에 보이잖아요. 너무 웃기다는 표정이나 반응이 진실 돼 보일 때 너무 행복하죠.


-그러면 가장 힘든 점은 뭔가요.


욕심을 안 부리면 힘들 게 없어요. 욕심 때문에 힘들죠. 좋은 기계를 사서, 더 나은 시스템을 구축하고 싶은데, 여건상 그러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그래도 지금은 수익이 생기고 있으니까, 고마운 일이죠. 주변에서 브랜드를 빨리 만들었다는 평을 들어요. 사장되지 않고 이어갔다는 거죠. 제가 죽지 않는 한, 계속 닷라인TV는 계속 될 것 같아요. 때려 쳐야 겠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늘 마음껏 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죠. 닷라인TV를 하면서 얻은 게 많아요. 지금도 얻고 있고요. 만약 갤러리에 소속 되서, 전시만 계속 만들었다면 행복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영원히 닷라인으로 재창조 하려고 해요.


-지금은 독립큐레이터로 활동하지만, 그 전에는 샘표스페이스 책임 큐레이터였잖아요. 거기에 속한 상태에서 닷라인을 만들었는데, 그런 게 가능한가요.


거기 시스템이 조금 특이한데, 다들 다른 일이나 강의를 하면서 샘표 일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어요. 샘표에서는 매일 출근하지 않았어요.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는 상근해서 일하지만, 저는 1달 한, 두 번 갔죠. 물론 전시 오프닝 날이나, 샘표 자체에서 일이 있을 때, 설치가 필요하거나 작가들과 공간을 보러가야 하는 날에는, 가서 뱀을 새기도 했지만요. 그런 식으로 하니까, 나머지 시간은 제가 쓰면서 일을 벌일 수 있었어요.


-부산아트갤러리, 정갤러리, 샘표스페이스를 거치면서 8년 째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계시는데, 돌이켜보면 어떤 시절을 보낸 것 같나요.


운이 좋았던 거 같아요. 처음 큐레이터를 하면 어시스턴트, 인턴 과정을 거쳐요. 어린 나이에 시작을 못하죠. 만약 한다고 해도 대관갤러리 큐레이터를 하게 되는데, 거기는 기획을 하는 시스템이 아니죠. 이름만 큐레이터지, 전시장 지킴이나 사무보조에 지나지 않아요. 보통 처음에는 그런 곳엘 들어가죠. 저는 운이 좋아서 처음 개관한 갤러리에 들어가거나, 기획만 미친 듯이 해야 하는 상황에 내던져졌어요. 첫 발부터 기획을 했죠. 실력이 쌓일 수밖에 없었어요. 제가 또 뭔가를 꾸미고 구성하는 걸 엄청 좋아하거든요. 적성에 맞는 거였죠. 그러다보니까 남들보다 빨리 성장할 수 있었어요. 게다가 큐레이터를 하면서 디렉터 역할까지 맡아야 되는 곳에서 일하다 보니까, 돈 쓰고 경영까지 했어요. 오너가 여건을 마련해 준 거예요. 모든 걸 가지고, 하고 싶은 걸 위해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 고마운 일이죠. 그런 과정이 없었으면, 이렇게 될 수 없었을 거예요.


큐레이터는 제2의 예술가


-본인이 생각하는 큐레이터의 정의는 뭔가요.


제2의 예술가라고 생각해요. 예술가들의 창작품을 전시로 재창조하는 거죠. 전시 자체에 큐레이터의 정신이 들어가잖아요. 전시 구성은 단순한 작품 진열이 아니에요. 큐레이터의 이념과 이데올로기가 들어가죠. 그래서 시간이 지난 후에 전시를 돌아보면 그 시대정신을 아우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사회의 지표죠. 다시 말하면 큐레이터는 사회의 지표를 표면화 시키는 직업이에요.  


-지금까지 추구해 온 일관된 이념이 있나요.


예전에는 그런 게 있다고 생각 안했어요. 지나고 나서 보니까, 대중 친화적이고 소통이 가능한 전시를 많이 만들었더라고요.


-큐레이터에게 필요한 자질은 뭘까요.


마음이 튼튼해야 해요. 무대를 만들고 작가와 작품을 빛내주기 위해 뒷받침 해주는 직업이잖아요. 스포트라이트는 자연 작가가 받죠. 사실 작가를 발굴하고, 역량을 끌어내주는 역할을 큐레이터가 하는데, 작가들은 그런 걸 생각 못할 때가 많아요. 큐레이터가 그런 걸 생각하고, 고민하면 상처받죠. 저도 어렸을 때는 상처를 꽤 받았어요. 그러면 버티지 못해요. 중심을 꽉 잡고 흔들리지 말아야죠.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하는 편인가요.


그렇죠. 재미있으니까요. 일중독인 거 같아요. 뭔가를 꾸며내고 만들어내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안 해도 되는 다른 기획을 생각하고 그랬죠. 만약 제가 어떤 사무직이나 회사원이 돼서, 매일 출근하고 서류 작성하고, 시키는 것만 했다면 못했을 거예요. 적성에 맞으니까 밤새서 일도 하는 거죠. 예전엔 몸이 약해서 집에 오면 거의 기절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집에서 놀면 몸이 아프고, 일하면 힘이 솟죠.


-그래도 힘들 때가 많죠?


육체적인 노동은 별로 없는데, 심리적으로 힘들 때가 많아요. 모든 일이 그렇지만, 일을 하면서 엎어질 수도 있고, 성사되기 전까지 같다가 흐지부지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런 게 많았어요. 아마 그런 게 전부 이뤄졌으면, 저는 우리나라에서 굉장히 유명한 기업인이 될 수도 있었을 걸요(웃음).


힘든 건 당연, 인내하면 기회는 또 찾아와


-그런 걸 어떻게 극복하나요.


여러 번 경험을 하니까, 나름의 극복 방법이 생겼어요. 자기 컨트롤이요. 사실 그런 거 하나 하나에 매달리면 진이 빠져서 아무 것도 못해요. 다음에 또 기회가 올 테고, 하다보면 더 많은 일이 일어날 테니까, 하나에 목숨을 걸지 않는 거죠. 예전에 안철수 교수가 TV에 나와서, 벤처기업을 시작하면 죽을 만큼 힘든데, 자기도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죠. 저렇게 대단한 사람도 힘들다고 하는데, 나 까짓 게 안 힘들면 말이 되나 하는 생각이요. 그렇게 힘든 건 당연하다고 위로하는 거죠.


-큐레이터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요.


제가 싫증을 잘 내는 편이에요. 예를 들면 한 곡에 꽂히면 수백, 수 천 번 들어요. 그 다음에는 평생 안 듣죠. 하나에 심취했다가 확 버려요. 미술은 7살 때부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 싫증이 안 나더라고요. 미술 밖에 모르고 살았어요. 다른 걸 하는 내 모습은 상상도 못해봤죠. 미술작업은 끝까지 못했지만, 큐레이터 일을 하고, 미술 방송을 하고, 그렇게 연결이 돼 왔어요.


-큐레이터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뭐에요.


백남준 아트센터의 학예팀장인 조선령 씨 덕이에요. 평론가이자 큐레이터로 활동하시는 분인데, 큐레이터를 하기 전부터 개인적으로 알던 분이에요. 그 분 때문에 큐레이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죠. 대학원을 처음에는 회화 쪽으로 갔는데, 거기서 작업하다가 한계도 느꼈어요. 시스템, 제도권 안에서 해야 하는 그런 거요. 라인 이런 거 싫어하거든요.


-그런데 회사 이름에 라인이 들어가네요.


그러게요(웃음). 아부하는 걸 싫어해요. 조직 속에 들어가는 것도 별로고요. 학교에서 작업하려면 지도교수 밑에 줄서야 하고, 교수님이 오라고 하면 가야 하는데, 그런 게 싫더라고요. 그래서 항상 빠졌어요. 스승의 날에도 선물 절대 안 하고요. 지금은 예술기획 대학원에 다니는데, 교수에게 따로 찾아가는 일은 없어요.


큐레이터, 아부할 필요도 억압당할 필요도 없는 독립적인 직업


-그래도 일하려면 그런 정치가 어느 정도 필요하지 않아요?


큐레이터는 그럴 필요가 없어요. 자기 스스로 발굴하고 컨택하는 거죠. 잡지로 치면 편집장이고, 영화에서는 영화감독이죠. 누구한테 아부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저랑 잘 맞는 거 같아요. 제가 미술 작업할 당시에는 인맥도 있어야 하고, 어느 그룹에 속해서 그룹전도 해야 했는데, 그런 정서가 저한텐 안 맞더라고요. 그렇다고 제가 천재라서 뭔가를 독단적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요. 큐레이터는 자기 능력대로 살면 돼요. 오히려 지금은 큐레이터의 권위가 상승돼서 작가들이 큐레이터에게 부탁하는 경우가 많죠. 물론 그런 것도 싫지만요.


-쉽지 않은 일 같네요.


예전에 어떤 잡지에 제가 칼럼을 썼어요. 그런 거 하지 말자고요. 비평적 관점을 흐트러트릴 만큼 사적인 친분을 갖지 말자고요. 권위나 사회적 계급 때문에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귀속되는 느낌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어요. 작가들의 경우 자기 전시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큐레이터에게 마케팅을 해요. 선택하고 결정하는 건 큐레이터의 몫이죠. 그러다보면 생기는 권위가 있어요. 그런 게 저는 싫어요. 그래서 저는 작가들과의 지나친 친분유지는 피해요. 그러면 인맥으로 전시하게 되니까요. 작품을 보고, 발굴하고, 작품이 좋으면 끝까지 가요. 작품은 별론데, 사람이 좋으니까 전시 해주는 거 절대 없어요.


-프랑스 유학을 갈 뻔 했다면서요. 창작을 하려고.


준비했었죠. 도와주던 교수님도 계셨고. 프랑스에서 살 집까지 알아봐둔 상태였어요. 그런데 못 갔죠. 어머니가 큰 수술을 받으시고, 형편이 어려워졌었거든요. 그러던 차에 국내 대학원에 들어가고, 큐레이터를 하면서 접었죠.


-내가 만약 유학을 갔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상상 안 해봤나요.


안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갔으면 창작 작업을 했겠죠. 그런데 아마 주목받는 작가는 안 됐을 거 같아요.


-요즘은 어떤 종류의 작품에 관심이 많나요.


언어가 작품에 개입해서, 언어와 함께 힘을 발휘하는 작품이요. 알맞게 집약된 단어를 모아서 적재적소에 한 줄 들어가는 작품에 관심이 많아요. 또 미디어 아트요. 미디어를 적극 활용해서 다른 시스템으로 변환하거나, 현대 매체를 적극 활용하는 작가들처럼 새로운 시각, 시도에 관심이 가더라고요. 지금의 문화를 적극 반영할 수 있는 동시대성을 갖춘 작품이라고 할까요.


-큐레이터는 정말 많이 알아야겠어요. 미술뿐만 아니라 사회현상에도 관심이 많아야겠고, 현장에서 지휘하려면 사람을 관리하는 기술도 뛰어나야 할 것 같고요.


큐레이터끼리는 멀티라고 해요. 급하면 못도 박아야 하니까요(웃음). 글은 기본적으로 잘 써야 하고, 비평적 시각도 갖춰야 할 테고요. 미술 역사는 당연히 알아야겠죠. 그런데 미술 역사를 알려면 세계사를 알아야 하고, 그러다보면 사회학 공부가 필요하고, 또 사회학에 관심을 갖다보면, 인간에 대해 파고들어서 심리학까지 손대야 하죠. 사회와 동시대성을 포괄하는 현상을 연구해야 하니까 늘 긴장해야 하는 직업이에요.


당장 이익 없더라도 뛰어들 수 있는 무모함 없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어


-나이를 먹는 다는 거,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요.


제가 올해 35이에요. 아직 미혼이고요. 예술, 학문 쪽에서 일하다보니까, 남들과 동떨어진 세계에 살고 있는 거 같아요. 이쪽 분야에서는 나이 마흔인데 싱글인 분도 많고, 오히려 제가 어린 축이죠. 또 닷라인 대표로 만나는 사람은 대부분 4~50대에요. 제가 항상 막내죠. 문화, 예술 외의 분야에 있는 제 또래의 사람들은 결혼에 집중하잖아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하고 이야기하면 무슨 소리인지 잘 몰라요(웃음). 어찌됐건 나이 먹는 건 좋은 거 같아요. 똑똑해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큐레이터로서의 목표가 있다면요.


ATU가 부산국제영화제처럼 어떤 걸 대표하는 상징성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장기적으로는 닷라인 큐레이터 팀을 활성화시켜서 한국에서 내놓으라하는 기획과 성과물을 만들어내는 회사로 인식시키고 싶어요.


-예비 큐레이터나 후배 큐레이터에게 필요한 조언 하나 해주세요.


일을 하다보면 이런 사람들을 봐요. 나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는데, 용기가 없는 친구요. 현실을 박차고 나갈 의지가 없는 거죠. 능력을 아깝게 썩히고 있는 것 같아요. 안타깝죠. 세상은 변했어요. 여자의 활동 영역은 넓어졌고, 원한다면 높은 사회적 지위도 가질 수 있는 세상이죠. 하지만 여성 스스로의 의식은 많이 안 바뀐 거 같아요. 결혼을 중심에 두고 다른 걸 생각하죠. 자기 인생의 스케줄부터 짜는 게 아니라, 결혼을 가운데 두고, 나머지를 주변으로 생각하죠. 그러다보면 기회를 놓치는 거죠. 당장은 돈이 안 되고, 내 앞에 떨어지는 현실적 이익이 없더라도, 거기에 뛰어들 수 있어야 해요. 그런 무모함이 없으면 절대 아무것도 이룰 수 없죠.


-그건 젊은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요.


맞아요. 단 1년만이라도 앞을 내다보면 다른 길이 보이고 가능성이 있는데, 당장 눈앞에 100만원 안 떨어지고, 월급 없다고, 모든 걸 포기하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그런 사람들 몇 명 모아놓고, 조금만 참으면 다른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설득하고 싶어요.


글/사진 | 김대욱. 홍희선

 

 

작성일 2009.11.05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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